존재, 그 참으로 덧없어 아름다운
오인태
친구여
작년 이맘때쯤 그대에게 편지를 쓰며
존재의 그림자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 같으네
또 여기까지 이렇게 숨가쁘게 달려 오고,
돌아보니 여전히 무거운 그림자를 늘어뜨린채
우리들 생애의 또 한해가 저물고 있네
친구여
지난번 추석 성묘때 낮아지는 어머니 산소를 보며
자꾸만 산다는 일이 뒤돌아 보여 눈물났다네
그날 밤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고향 마을을 몰래 기웃거리며
잊혀져가는 어머니의 생애를 되찾아보려 했지만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기억 위로 보름달만
휘영청 밝아 가슴까지 흥건히 취해서 돌아왔었네
친구여
꼽아보니 우리들 생애도 벌써 반으로 꺾여
내리막길을 걸어야 할 나이네
앞만 보며 오르다가
이제 자꾸만 올라온 길이 뒤돌아 보인다든지,
우리 존재의 태어난 고향의 일들, 혹은
잊고 지냈던 사람들이 문득 그리워지는 걸 보면
벌써 우리들의 존재는 왔던 길을 되돌아
제 태어난 곳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네
그러다 언젠가는 우리들의 생애도
그 그림자를 흙에 묻고
세상의 기억에서 까마득히 사라지고 말 것이네
생각하면 참으로 덧없는 삶이거늘, 그러나
친구여
우리 이제 내려가는 길에는
그동안 곁눈질 한 번 주지 않은 채
무심코 지나쳐왔던 조그만 돌멩이며
풀꽃 하나도 유심히 챙겨 가슴에 간직하며 가도록 하세
우리들 존재의 흔적, 그 덧없음조차 말끔히 묻어줄
그들에게 감사의 미소와 인사말도 미리 전하며,
그 또한 덧없고 부질없다 한들,
친구여
고향을 찾았던 그날 밤, 나는 어머니의 생애를 하얗게
지운 채 떠있는 보름달을 보며, 덧없음도 품에 안으니
눈물겹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았다네 그러니
친구여
우리들 존재의 살아있는 동안 존재의 참으로 덧없어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살아가도록 하세
오늘도 덧없는 존재의 하늘 위로 덧없이 아름다운
달 하나 솟을 것이네
사랑하네 친구
-시집 『혼자 먹는 밥』에서